이번
호에는 <뉴스메이커> 지난
1월 25일 408호에 실린 '만나봤습니다/박경리
선생 원주 현지 대담'을 옮겨봤습니다.
부분만 옮겨 적을까 하다가 그러지
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
전체를 옮겨보았습니다. 조금
길더라도 꼭 끝까지 읽어주세요.
(MED010201)
자기 위주로 살면 환경이 파괴되지요
“눈도 오고 길도 미끄러운데 이 산골짜기에 뭐하러 와.” 한사코 인 터뷰를 거절하는 박경리 선생에게 그저 새해 문안인사 드리려 한다 고
우긴 뒤 막무가내 원주로 가는 길, 눈이 왔다. 흥업면 매지리 백 운산 자락, 그의 집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. 정갈한 비질로 세 뼘 너 비의
길을 내놓은 마당. 거위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목을 빼고 뒤뚱걸 음질을 했다.
박경리 선생은 원주에서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산다. 혼자 산다지만 혼 자는 아니다. 알을 얻으려고 기르는 닭 4마리, 집 지키는 거위와 집
밖으론 도통 나갈 생각을 않는 고양이 한 마리, 모두 7식구가 함께 산다. 청윗옷과 청치마 차림으로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. “택시도 잘 안
태워주려 하는 늙은이한테 뭐 들을 말이 있다고 찾아와.” 벌써 우리나이로 75세. 그는 세월을 하얗게 인 머리를 손빗질하며 “왔으니 인터뷰는
말고, 앉아 놀다가라”고 했다. 창 밖으론 눈을 하얗게 이고 있는 산굽이들이 흘러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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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1세기로 넘어오며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건 자본주의입니다. 물질 만능주의가 더 기승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.
“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도 물질 위에 세워진 것이지요. 두 주의 의 바탕은 같아요.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유를, 사회주의는 평등을 앞
세우지요. 그래서 둘은 섞일 수 없습니다. 인류는 평등보다 자유를 택했지요. 내 이익에만 집착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는 농촌에서도 심각 해요. 이
산골짜기에도 주식광풍이 불었어요. 빚내서 주식 사고, 주부 는 가정 팽개치고 하루종일 객장에서 삽니다. 이런 한탕주의, 중독현 상을 내 상식으론
이해할 수 없어요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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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본주의의 폐해는 치유할 수 없는 걸까요. 어떤 이들은 그 대안적 가치나 철학을 동양사상에서 찾으려 하기도 하는데요.
“실마리를 환경주의에서 찾았으면 해요. 다시 말해 다같이 살자는 거지요. 인간 위주로 지구를 바라보다 환경이 파괴된 겁니다. 그런데 도 그
심각성을 몰라요. 위정자들도 환경을 지엽적인 걸로 치부하지 요. 하지만 환경은 본질입니다. 지구는 지금 큰 병을 앓고 있습니다. 땅덩이에 열이
있어요. 이 늙은이는 그게 몸으로 느껴져요. 저기 남 쪽에서나 피던 백일홍이 지금은 이곳 원주 산골짝에서도 피고 어렸 을 때 이곳에선 안 열렸던
감도 열려요. 우리는 지금 우주질서를 어 기고 있습니다. 우주와 싸우려 합니다. 그러나 어림 없어요. 가장 위 험한 건 문명에 대한
과신(過信)입니다. 물질 위주의 생활이 환경을 죽이고, 우리 정신까지 죽이고 있습니다. 환경이 죽으면 정신이 죽어 요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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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부에선 이미 인류가 호랑이 잔등에 올라탔기에 내려설 수 없다 는 진단을 내놓기도 합니다.
“먼저 절망해야 합니다. 우리 사회엔 절망하는 사람이 의외로 없어 요. 모두 희망만 이야기하지요. ‘어떻게 되겠지’라는 막연한 생각, 그걸
희망이라고 믿고 삽니다. 다 죽어도 나만은 살겠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요. 모두 불확실한 가짭니다. 그러나 절망은 현실을 바 로 보게
합니다. 거기에서 새로 일어나야 합니다. 차라리 모든 게 빨 리 썩고 썩어서 정리된 후에 다시 출발하는 게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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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건 살아 있는 것들에 가혹한 재앙이 아닙니까. 가령 환경호르몬 등의 영향으로 인류에 불임(不姙)이란 형벌이 찾아올 수도 있듯이 말
입니다.
“개미들을 보세요. 미물이라는 그들도 길을 가다가 벽에 부딪히면 새로운 길을 찾아 방향을 틉니다. 마찬가지로 인류도 벽에 부딪히면 반드시
방향을 틀 것입니다,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. 그때 비 로소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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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의 전통적 우주관이랄까 환경에 대한 인식은 어땠는지요.
“우리는 대단한 생명존중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. 불가(佛家)의 연꽃, 당집의 꽃, 상여를 뒤덮은 꽃이 모두 조화였습니다. 세계적으로
우수한 도자기 문화를 자랑하지만, 가만히 생각해보세요, 술병과 그 릇들은 많아도 꽃병은 없습니다. 들에 있는 꽃을 꺾어다 제 주변 치 장할
생각을 안 했던 겁니다. 한국이 샤머니즘 중심지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. 백두산 전설을 찬찬이 살펴보니 온갖 샤머니즘과 윤회사상이 들어 있어요.
샤머니즘과 윤회사상은 곧 생명 존중 사상입니다. 천 년 세월을 산 나무가 인간보다 못할 게 없지요.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, 어떤 형태로
존재해도 생명은 피동이 아닌 능동입니다. 요 즘은 그 귀한 생명들을 함부로 죽이고도 죄의식조차 없어요.”
"먼저
절망해야 합니다.
절망은
현실을 바로 보게 합니다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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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간이 생명을 생존도구나 쓰임새로만 보기 때문이 아닌가요.
“인간 역사의 숱한 혁명이 모두 인간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. 생명 을 위한 혁명은 없었지요. 그러다보니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끊기고
말았습니다. 우리는 지구를 하나의 생명 연합체로 봐야 합니다. 내가 하나의 우주라면, 지구는 나를 포함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우주입니다. 인간만을
위한 삶은 결국 다른 생물을 착취하는 것이고 우주를 파괴 하는 겁니다. 인간이 뭇생명들을 다 죽인 뒤엔 그 총구를 어디로 돌 릴 것 같아요?
바로 인간입니다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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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라가 온통 썩었다고 난리들입니다. 선생님이 보시기에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요.
“뇌물 수수를 관행이라고 하니 말이 됩니까. 관행은 습관입니다. 부 정의 습관화, 부패의 정당화지요. 젊은 사람들도 물들었는지 도대체
야망이 없어요. 청춘은 야망이 있어 아름다운데, 눈앞의 것만을 탐닉 한단 말입니다. 야망이란 말 그대로 멀리 보는 것 아닙니까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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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즘은 계층과 직업을 불문하고 집단이기(利己)에 물들어 있습니 다. 글 쓰는 사람들조차 ‘문단권력’ 논란에 휩싸여 있는데요.
“다수가 언제나 정의인가 묻고 싶습니다. 다수란 힘이 모인 것입니 다. 그 힘이 인류와 역사를 변화시켜 왔지요. 그런데 요즘의 다수는 힘이
아니라 욕망의 결집체입니다. 패거리에 불과해요. 더군다나 예 술은 섞을 수 없습니다. 정신을 어떻게 섞습니까. 작가는 책상과 단 둘이 있으면
됩니다. 문단권력이 존재한다면 이는 창작이란 행위가 상업주의에 물든 탓이겠지요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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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치가 바로서지 않고 사회가 어지러우면 어른들과 지식인들이 나 서야 하지 않을까요.
“내가 보기엔 지식인들도 권력과 야합하고 시녀노릇하기 바빠요. 새 차를 사고 아파트 평수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. 지식인 들이
그러니 정치인들이 누굴 겁내고 무서워하겠습니까. 또 예술가는 돈벌이에 골몰하고 있어요. 나를 포함해 비겁한 사람들입니다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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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즘 문학이 고사 위기를 맞았다는 지적들이 있습니다.
“한국문학은 한마디로 황량한 벌판에 서 있습니다. 복잡하고 진지한 건 싫어해요. 모두들 가볍고 재미있는 것만을 좇아요. 예술이 아니라
오락이지요. 문학이란 그리움과 영혼의 소리를 찾아가는 것인데 이렇 듯 오락에 취해서야…. 나는 이를 자본주의 말기 현상이라고 진단합 니다.
하지만 모든 젊은들이 그렇진 않겠지요. 그래서 아까도 말했듯 이, 막히면 방향을 틀듯 젊은층에게서 새로운 기풍이 일어나길 기대 합니다. 그들을
믿어야지요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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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품활동은 사실상 중단하고 계신데요. 다시 붓을 들어야 하지 않 습니까.
“쓰고는 싶지만 쓸 수가 없어요. 충격과 슬픔이 너무 크면 아무말도 안 나오잖아요. 요즘 같은 세태엔 <토지> 같은 작품도
필요없을 듯 합니다. 이제 늙어 글 쓸 힘도 별로 없지만, 현실을 보고 있으면 글 쓴다는 그 자체가 너무 숨가쁩니다. 글 몇 줄이 이 사회에
무슨 소용 이 있을까. 히말라야에라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. 허나 곰곰 생각하면 그곳에 간들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. 문명을 비판하면서
도 결국 이 속에서 살아야 하니 할말이 없군요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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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제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시고, 세상 일에 꾸중도 하시고, 그러셔 야죠.
“글쎄요, 노년의 지혜가 이렇듯 구겨진 건 일찍이 없었지요. 지금 시골에 가면 버려진 노인이 얼마나 많습니까. 밥 굶는 노인도 많습니 다.
옛날엔 이들을 마을에서 거뒀어요. 이제 정마저 메말랐으니…. 고 려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. 짐승들도 먹을 게 없어 굶어죽는대 요. 내가 좀
젊었으면 자동차라도 몰고 다니며 그들을 돌보고 싶어 요. 모든 게 여의치 않아요. 하기야 지금이라도 모든 걸 훌훌 털고 일어나면 가능하겠지요.
내가 욕심을 못 버리니 이렇게 편히 있는 거 겠지요.”
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눈이 내렸다. 미친듯이 나부끼는 눈발. 그를 유배시키고 우리만 돌아가는 걸까, 아니면 선계(仙界)에서 그를
만나고 다시 아수라지옥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. 우리가 꺼낸 세 상이야기에 그가 심란했다면 너무 죄스러운 일이다.
